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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s Story/오키나와 역사

Ep.06 태평양 전쟁

by okiz 2020. 6. 14.

들어가며...

헷갈릴 수도 있으니 다음 세 용어를 먼저 정리하겠다.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대전, 대동아 전쟁

 

-태평양 전쟁과 제 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보는 관점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개전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을 태평양 전쟁이라 일컫는다. 이 글에서는 중일전쟁의 시작인 1937년 부터의 일을 소개한다(1941년을 개전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대동아 전쟁

일본이 만든 용어다. '일본 주도의 구미열강으로 부터의 해방', 즉 대동아 공영권을 슬로건으로 달고 전쟁의 목적을 정당화 시킨 명칭이다.


0. 중일전쟁의 서막, 루거오차오 사건

1932년 일본은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3년 후인 1937년에 만주에 대한 통제권이 생기자 중국의 내륙으로 들어갈 계략을 세운다. 그러던 중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는데...

 

1937년

1937년 7월7일 밤. 일본군은 베이징에서 멀지 않은 루거우차오(盧溝橋, 노구교)라는 곳에서 야간훈련을 실시한다. 그러던 중, 일본군 진영에서 총소리가 났고 이로인해 일본군 한 명이 행방불명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일본은 중국진영에 수색대원들을 보내겠다고 요청했으나 거부 당한다. 다음날 8일. 일본군은 포격을 실시하였고 이 것이 바로 '루거오차오 사건'이다(일본군은 정말 우연과 기적과 우주의 힘으로 실종 된지 20분만에 부대 복귀).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화북지역(華北, 화베이)을 차지하여 중국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11일에 정전협정에 들어갔으나 둘 사이의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고, 일본은 전면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바로 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루거오차오 전경. 출처=wikimedia commons & Taken by  Fanghong

 

tmi.

-이 다리위의 사자 모양상이 500여개 있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셀 수 없어, 중국에서는 셀수 없는 것을 '루거오차오의 사자'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탐험가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이 다리를 필적할 만큼 아름다운 다리는 없다'라고 하여 서방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다리(Marco Polo Bridge)라고도 한다.

 

0. 중국의 상황

한편, 1912년 중국에서는 쑹자오런(宋敎仁)과 쑨원(孫文)이 난징(南京)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를 구성한다. 1925년 쑨원이 사망하자 장제스가 뒤를 이어 중국 국민당 계열을 이끈다. 이후 세력을 키운 장제스는 중국 대부분을 장악한다. 한편, 아버지 장쭤린을 잃은 장쉐린이 다가오자 동북지역(만주지역)의 군지휘관에 앉힌다(Ep.05참조).

 

1936년

반일 감정이 극도로 치솟는 가운데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에 장쉐린은 내전을 잠시 멈추고 일본과의 항전을 요구하며 공산군 토벌에 소극적으로 나선다. 거듭 항전을 요구한 장쉐린은 자신을 무시한 장제스를 체포하기로 결정하고 이는 시안사건으로 이어진다.

 

결국 민중의 항일 기세에 눌리자 장제스도 공산군과 싸우는 것을 멈추고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한편, 팔로군(八路軍, 중국 공산당)과 한국 광복군(대한민국임시정부) 등과 함께 연합하여 항일전에 가담한다. 

 

0. 미국의 발판, 오키나와

1941년

일본은 진주만을 선전포고 없이 공습한다. 이 때까지 미국은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가 아니었으나, 태세를 갖추고 반격에 나서 태평양의 섬을 하나씩 점령하며 일본 본토로 진격한다. 당시 일본 본토의 최후 방파제는 오키나와였는데, 이를 알아차린 미국은 결국 오키나와로 진격할 작전을 세운다.

 

0. 오키나와 비극의 시작, 1945년

3월과 

오키나와섬 주변에는 1,500척 가량의 미군 함대가 모인다. 4월1일에는 주력 4개 사단이 카데나(嘉手納, 아메리칸 빌리지 위쪽)에 별 다른 저지 없이 들어선다. 당시 미군의 병력은 54만 명, 일본군은 10만 명으로 현격하게 차이가 났다. 게다가 일본군 10만 명 중 1/3은 오키나와 현지에서 징집한 병력이다. 일본군은 주로 남부 지역에 배치된 상황이라 미군은 쉽게 상륙할 수 있었다.

 

4월

미국이 상륙한 이튿날, 요미탄촌 치비치리가마(チビチリガマ, '가마'는 오키나와 말로 '자연동굴')에 숨어 있던 주민들이 집단 자결을 한다. 어폐가 있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은 자결을 유도 받았다. 미군들이 사람들을 동굴에 몰아 두고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여 죽이거나 혹은 먹을 것 등으로 유인하는 수법이 있었기 때문에, 오키나와 주민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그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자는 식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렇게 자결을 한 것이다. "미군 포로가 되면 여자들은 능욕 당하고 남자들은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한다"라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이는 오키나와 본토 섬 뿐만 아니라 게레마제도, 그리고 만주지역 거주 일본 개척단 주민들 사이에서도 발생했다.

 

6월

 

우시지마 미츠루(牛島満). 출처=wikimedia commons

 

23일. 일본군 수비대 사령관이었던 우시지마 미츠루(牛島満)는 미군의 공격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자 오키나와의 남부 마부니(摩文仁, 평화기념공원)까지 밀렸고 그 곳에서 자결한다. 이로써 오키나와 전투는 막을 내렸다.

 

8월

6일과 9일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항복을 선언하며 공식적인 전쟁이 끝난다.

 


 

한편,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던 오키나와전은 또 다른 이권 다툼의 전쟁으로 빨려 들어 가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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